아버지와 친척들과의 마지막 모임을 못 가졌던 아쉬움
아버지가 몇달 전 돌아가셨다.
난 그리움과 후유증이 없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상당히 있다.
실제로 보내드리고 한두달은 공황증세로 아무것도 못했다. 덕분에 하던 일들이 많이 틀어졌다.
그런 나를 보며 놀란다. 아버지께는 마음 다 드리고, 아쉬움 없이 보내드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문득 문득 아버지에게 못해드린 아쉬움이 진하게 여운으로 남는다.
그래도 아들로서 가장 기쁜 것은 아버지가 생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가신 것.
아쉬운 것은 아버지가 괜찮은 상태일 때, 친척들과의 화목한 모임을 갖지 못한 것이다.
뇌출혈로 1차 쓰러지시고, 다행히 다시 재활 하셨을 때, 그 모임을 했었어야 했다.
어려운 재활을 거쳤지만, 다시 허무하게 2차 뇌출혈 재발하고, 4년여를 고생스럽게 누워계시다가 얼마 전에 가신 것이다.
전형적인 유교 집안
우리 집안은 전형적인 한국식 유교집안이었다.
명절에는 아주 먼 땅끝에 가까운 곳까지 가서,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고, 5촌 친척 집에 가서 아버지의 4촌 친척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었다.
어린 눈에는 아버지의 형제들이 가깝고 우애 좋아보였다.
아버지 세대는 전쟁도 겪고, 매우 가난한 시기였으니, 다들 돕고 살았어야 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친척들간에 서로 도왔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흐믓하였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당신의 형제들에게 베푼 은혜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흐믓하였다.
할머니 생전에 할머니 댁에 모여 3촌 친척 어른들, 4촌 형제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았었다.
아버지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으며, 당신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시면서 집안에서 역할을 하길 기대하셨었다.
개인적으로는 내 인생에 도움도 되지 않는 이들한테 과도한 친목 도모를 싫어했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상당했었는데,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우리 세대의 그것보다 훨씬 폭 넓었던 것 같다.
아마도 아버지가 친척들에게 받은 사랑을 아들인 나를 통해 베풀었으면 하는 마음이셨을 것이다.
그러한 부채감이 아직도 있다.
지역적으로 멀어지며 멀어지고, 제사를 안 지내며 끊어짐
친척들과 사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교류를 안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더라.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멀어졌다.
그리고, 내가 결혼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고, 친척들과 더 멀어지기 시작했다.
은혜롭게도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지침에 따라서, 지내던 제사 행사를 거부하게 되었고, 친척들과 만날 시간이 없어지면서 멀어졌다.
4촌 형제들도 다 성장하고 다 바쁜데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명절 때 뿐인데 , 그 때 못 만나니 멀어질 수 밖에.
어릴 때는 사이좋게 놀던 친척 형제들이고 가끔 그립긴 하지만,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보다 가까울수 없고, 다들 각자 살기 바쁜데 교류 할 일도 없더라.
친척이라고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이 부담감이 없는 것도 아닌 관계인데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에는 더 큰 가족이었기에,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못한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하기 어렵다.
차라리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에게 더 잘 해주고 싶지, 친척이라고 더 잘 할 이유는 없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가진 부채감을 갚아야 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만나시고 제사에 대해서는 포기하시면서 마음은 편해졌었지만, 친척들과의 친밀감을 더 느끼고 싶으셨을 것이다.
대가족의 모임에서 마지막 환담을 나눌 기회를 못 해드린 것에 대해 송구함을 느낀다.
이 시대에서의 대가족은?
4촌들이 그립다.
가끔은 많이 보고 싶다.
가끔은 힘든 인생 이야기를 터 놓고 다 이야기 나누고 싶다.
21세기에서의 대가족은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일까?
더 잘 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마음의 풍요로움은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만큼 사는 것일까?
더 사랑하며 살자. 더 베풀고 살자.
아버지, 천국에서 부디 편하게 지내고 계시길 빌게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