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4일 금요일

아버지에 대한 기억 - 5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돌아가시고 문득 문득 생각나는 그 분을 추모하기 위함이다. 외롭고 쓸쓸할 때마다 나타나시는 것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지 아버지를 우상화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버지를 떠나 보내는 마음이다.


초등학교 6학년 FC-100 ,애플 II 와 첫 만남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였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었다.

당시 개인용 컴퓨터 보급 사업이 있었나보다.

1984~1985년도 시절이었으니 집에 브라운관 컬러티비가 있던 시기였지만, 개인용 컴퓨터가 집에 있던 시기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CA(특별활동)으로 컴퓨터 반이 생겼다.

간단한 영어 알파벳 시험을 보고 입반 시험에 합격하여 그 신기한 컴퓨터를 손으로 만져보게되었다.

FC 100 이라는 컴퓨터였다. 금성사에서 나온 8비트 컴퓨터였다. 



너무나 신기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전주에 직장을 얻으신지 꽤 되었는데, 기러기 아빠처럼 지방에 홀로 지내셨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전주로 이사갔다.

덕분에 나는 신기해하던 컴퓨터를 접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부모님에게 투덜거렸다.

서울에서는 컴퓨터반에서 컴퓨터도 배웠는데, 배울 수 없게 되었다면서 ㅎㅎ

아버지는 전주에 있는 컴퓨터 학원을 끊어주셨다. 전주컴퓨터학원.


아마도 내가 되게 불만을 토로했었나보다.

그 컴퓨터 학원에서 BASIC을 3개월 정도 배웠다. 

FOR 문과 PRINT 문으로 별표(*)를 찍으면서 삼각형도 그리고, 여러가지 신기한 것들을 그렸다.

화면에 나온 것을 프린터로 뽑아 보기도 했다.

컴퓨터 학원 한켠에는 ASCII 문자로 찍은 모나리자가 매우 자랑스럽게 붙어있었다.

너무 신기했었다. 문자로 찍은 그림이 정말 모나리자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신기한 게임들도 했었다. 

MSX 컴퓨터에는 게임이 엄청 많았는데, 애플 컴퓨터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재밌는 게임들이 많았다.

기억나는 게임으로는 '로드러너', '엑스리온' 같은 게임이 생각난다.



정말 컴퓨터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지냈던 것 같다.

3개월 정도 배운 가을 쯤에 전라북도에서 열리는 1회 컴퓨터 경진대회가 열렸는데, 학원에서 나가보라고 해서, 같이 배우던 친구들과 참가했었는데, 무려 대상을 타버렸다.

대상 상품은 기억나기로 그냥 앨범이었고, 전라북도 도지사님에게 직접 표창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길로 더 컴퓨터에 빠져버렸다.

애플 호환기종 컴퓨터를 배웠었는데, 나중에는 6502 어셈블리어도 배우고, 학원에 있는 다른 코스도 배웠었다. 



베이직을 다 배워 더 배울게 없어지자, 포트란(FORTRAN), 코볼(COBOL)도 배웠었는데, 또 다른 세상이 열렸었다.

당시 컴퓨터 학원에 대형(?) 컴퓨터가 있었는데, 이름이 MV-4000(?) 이었다. 항온항습실에 모셔져 있었고,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던 컴퓨터였다.

엄청 큰 테이프가 돌았고, 라인 프린터로 한 번에 한 줄씩 찍어버리는 엄청 멋진 기능을 갖고 있었다.

포트란,코볼을 배울 때 코딩 내용을 적어 제출하면, 펀치카드로 변환하여 입력한 코드가 실행되어, 결과를 다음 날에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키펀쳐라는 직종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즉, 코딩 내용을 펀치 카드에 실수 없게 입력하는 것이 직업인 직종이었다.




애플II 오너

1년후 쯤에 아버지가 거금을 들여 애플 II 컴퓨터를 사주셨다. 당시 학원에서 컴퓨터도 팔았었다. 배우던 컴퓨터와 똑같은 기종이었다. 당시 애플 클론, 애플 호환기종들이 많았었는데, 애플 II 컴퓨터랑 성능이 더 좋았던 기억이 있다. 오리지널 애플 II는 가격이 비쌌는데, 오리지널의 멋짐은 있었던 것 같다. ㅋ 

당시 40만원주고 샀던 것 같다. 1986년도? 물가로 계산하면 얼마 정도 일까? 짜장면이 500원 정도 했었던 것 같은데.  짜장면 800 그릇? 800만원으로 봐야 할까? ㅎㅎ

아버지가 엄청 무리하셨던 것 같다. ㅎ

자식이 빠져들었던 그것을 위해서 아낌없이 돈을 쓰신 그 분에 대한 DNA 가 나에게도 남아있다.

가족에게 돈 걱정 안하게 하고 싶고, 후배들에게는 정말 잘 해주려고 하고, 조언해주고 싶고, 투자하고 싶고 그렇다.


네이티브 컴퓨터 프로그래머?


컴퓨터가 생기자 더 빠져들었다. 

그렇게 내가 네이티브 컴퓨터 프로그래머 키즈 1세대 정도 되었다고 봐야 할까? 

이후 중학교 때,고등학교 때도 컴퓨터 경진대회에 나갔지만 전국 규모에서는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공부가 나름 재밌어져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약간 멀어졌었던 것 같다.

당시 영문법책을 그대로 베껴 영문법 학습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었는데, 출시를 못했다. 

기억나는게, 첫 화면에 로고를 뿌리는데, 멋지게 영문법책 이름과 내 싸인을 출력한다.

당시 고해상도 그래픽 모드가 가로 480 정도 크기였던 것 같은데, 모눈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벡터처럼 라인의 좌표를 하나씩 따서, 그걸 베이직 코드로 일일이 코딩해서 그렸던 기억이 난다. 라인을 그리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마치 애니메이션 되듯이 로고를 그려졌었는데, 의외의 효과가 나서 나쁘지 않았다. 

한글 폰트가 예쁘지 않아서, 폰트 에디터를 어디서 구해와서, 문장에서 쓰이는 글자들을 코드화해서 일일이 찍어서 화면을 구성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완성형 코드같은 개념? ㅎㅎ

마이크로소프트웨어라는 잡지에서 신기한 컴퓨터 소프트웨어들도 접했었다.

고등학교때는 터보씨를 배워서 C언어로 하는 것으로 경진대회에 나갔었던 기억이 난다.

임인건님의 터보씨 정복이라는 엄청 두꺼운 책을 봤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기억나는데 당시 권모 선배가 대상을 탔는데, 나중에 대학 선배가 되어 계셨다. 그 분은 모르시겠지. 


아버지가 많은 배려를 해 주셨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제대로 갚지도 못했는데, 송구한 마음 뿐이다.

아직도 내가 더 잘 살길 바라시겠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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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 대한 기억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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