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아버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아버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3년 11월 24일 금요일

아버지에 대한 기억 - 5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돌아가시고 문득 문득 생각나는 그 분을 추모하기 위함이다. 외롭고 쓸쓸할 때마다 나타나시는 것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지 아버지를 우상화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버지를 떠나 보내는 마음이다.


초등학교 6학년 FC-100 ,애플 II 와 첫 만남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였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었다.

당시 개인용 컴퓨터 보급 사업이 있었나보다.

1984~1985년도 시절이었으니 집에 브라운관 컬러티비가 있던 시기였지만, 개인용 컴퓨터가 집에 있던 시기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CA(특별활동)으로 컴퓨터 반이 생겼다.

간단한 영어 알파벳 시험을 보고 입반 시험에 합격하여 그 신기한 컴퓨터를 손으로 만져보게되었다.

FC 100 이라는 컴퓨터였다. 금성사에서 나온 8비트 컴퓨터였다. 



너무나 신기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전주에 직장을 얻으신지 꽤 되었는데, 기러기 아빠처럼 지방에 홀로 지내셨었다. 결국 우리 가족은 전주로 이사갔다.

덕분에 나는 신기해하던 컴퓨터를 접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부모님에게 투덜거렸다.

서울에서는 컴퓨터반에서 컴퓨터도 배웠는데, 배울 수 없게 되었다면서 ㅎㅎ

아버지는 전주에 있는 컴퓨터 학원을 끊어주셨다. 전주컴퓨터학원.


아마도 내가 되게 불만을 토로했었나보다.

그 컴퓨터 학원에서 BASIC을 3개월 정도 배웠다. 

FOR 문과 PRINT 문으로 별표(*)를 찍으면서 삼각형도 그리고, 여러가지 신기한 것들을 그렸다.

화면에 나온 것을 프린터로 뽑아 보기도 했다.

컴퓨터 학원 한켠에는 ASCII 문자로 찍은 모나리자가 매우 자랑스럽게 붙어있었다.

너무 신기했었다. 문자로 찍은 그림이 정말 모나리자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신기한 게임들도 했었다. 

MSX 컴퓨터에는 게임이 엄청 많았는데, 애플 컴퓨터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재밌는 게임들이 많았다.

기억나는 게임으로는 '로드러너', '엑스리온' 같은 게임이 생각난다.



정말 컴퓨터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지냈던 것 같다.

3개월 정도 배운 가을 쯤에 전라북도에서 열리는 1회 컴퓨터 경진대회가 열렸는데, 학원에서 나가보라고 해서, 같이 배우던 친구들과 참가했었는데, 무려 대상을 타버렸다.

대상 상품은 기억나기로 그냥 앨범이었고, 전라북도 도지사님에게 직접 표창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길로 더 컴퓨터에 빠져버렸다.

애플 호환기종 컴퓨터를 배웠었는데, 나중에는 6502 어셈블리어도 배우고, 학원에 있는 다른 코스도 배웠었다. 



베이직을 다 배워 더 배울게 없어지자, 포트란(FORTRAN), 코볼(COBOL)도 배웠었는데, 또 다른 세상이 열렸었다.

당시 컴퓨터 학원에 대형(?) 컴퓨터가 있었는데, 이름이 MV-4000(?) 이었다. 항온항습실에 모셔져 있었고,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던 컴퓨터였다.

엄청 큰 테이프가 돌았고, 라인 프린터로 한 번에 한 줄씩 찍어버리는 엄청 멋진 기능을 갖고 있었다.

포트란,코볼을 배울 때 코딩 내용을 적어 제출하면, 펀치카드로 변환하여 입력한 코드가 실행되어, 결과를 다음 날에 받을 수 있었다.

당시 키펀쳐라는 직종도 있었던 기억이 난다. 즉, 코딩 내용을 펀치 카드에 실수 없게 입력하는 것이 직업인 직종이었다.




애플II 오너

1년후 쯤에 아버지가 거금을 들여 애플 II 컴퓨터를 사주셨다. 당시 학원에서 컴퓨터도 팔았었다. 배우던 컴퓨터와 똑같은 기종이었다. 당시 애플 클론, 애플 호환기종들이 많았었는데, 애플 II 컴퓨터랑 성능이 더 좋았던 기억이 있다. 오리지널 애플 II는 가격이 비쌌는데, 오리지널의 멋짐은 있었던 것 같다. ㅋ 

당시 40만원주고 샀던 것 같다. 1986년도? 물가로 계산하면 얼마 정도 일까? 짜장면이 500원 정도 했었던 것 같은데.  짜장면 800 그릇? 800만원으로 봐야 할까? ㅎㅎ

아버지가 엄청 무리하셨던 것 같다. ㅎ

자식이 빠져들었던 그것을 위해서 아낌없이 돈을 쓰신 그 분에 대한 DNA 가 나에게도 남아있다.

가족에게 돈 걱정 안하게 하고 싶고, 후배들에게는 정말 잘 해주려고 하고, 조언해주고 싶고, 투자하고 싶고 그렇다.


네이티브 컴퓨터 프로그래머?


컴퓨터가 생기자 더 빠져들었다. 

그렇게 내가 네이티브 컴퓨터 프로그래머 키즈 1세대 정도 되었다고 봐야 할까? 

이후 중학교 때,고등학교 때도 컴퓨터 경진대회에 나갔지만 전국 규모에서는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공부가 나름 재밌어져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은 약간 멀어졌었던 것 같다.

당시 영문법책을 그대로 베껴 영문법 학습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었는데, 출시를 못했다. 

기억나는게, 첫 화면에 로고를 뿌리는데, 멋지게 영문법책 이름과 내 싸인을 출력한다.

당시 고해상도 그래픽 모드가 가로 480 정도 크기였던 것 같은데, 모눈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벡터처럼 라인의 좌표를 하나씩 따서, 그걸 베이직 코드로 일일이 코딩해서 그렸던 기억이 난다. 라인을 그리는 속도가 빠르지 않아서, 마치 애니메이션 되듯이 로고를 그려졌었는데, 의외의 효과가 나서 나쁘지 않았다. 

한글 폰트가 예쁘지 않아서, 폰트 에디터를 어디서 구해와서, 문장에서 쓰이는 글자들을 코드화해서 일일이 찍어서 화면을 구성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완성형 코드같은 개념? ㅎㅎ

마이크로소프트웨어라는 잡지에서 신기한 컴퓨터 소프트웨어들도 접했었다.

고등학교때는 터보씨를 배워서 C언어로 하는 것으로 경진대회에 나갔었던 기억이 난다.

임인건님의 터보씨 정복이라는 엄청 두꺼운 책을 봤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기억나는데 당시 권모 선배가 대상을 탔는데, 나중에 대학 선배가 되어 계셨다. 그 분은 모르시겠지. 


아버지가 많은 배려를 해 주셨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제대로 갚지도 못했는데, 송구한 마음 뿐이다.

아직도 내가 더 잘 살길 바라시겠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 - 4 

아버지에 대한 기억 - 3 

아버지에 대한 기억 - 2 

아버지에 대한 기억 - 1 







2023년 11월 16일 목요일

아버지에 대한 기억 - 4

 

어제 아버지에 대한 글을 몇개 쓰고 나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더 떠오른다. 

참 지독하시다.

아버지는 돌아가셔도 이렇게 나를 붙잡고 계시다.

왜 아니겠는가? 내가 아버지라도 두고 온 자식이 그리울 거다.


아버지가 나를 돌봐준 준 지점에서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내가 대견하고 자랑스러워하셨던 거다.

남들이 감히 못 가는 학교에 갔었고, 지원 없이 나름 자수성가했으니까....

큰 말썽도 없었고, 재능있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계셨을거다.

나는 살아생전에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표현을 잘 못 했다.

그게 너무 죄송하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 보면, 내 스스로 잘 나서, 내가 스스로 길을 닦아왔다고만 생각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배려와 사랑이 아니었으면 무너졌을지도 모르는 건데...


아버지가 탄식하던 순간이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게임에 몰두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당시 '오락실'로 인식되던 그것은 그저 일탈행위로만 보였을것이다.

재능 있는 아들이 유학가서 더 큰 세상을 배우고 일반적으로 더 근사한 일을 하길 바라셨다.

나중에서야 큰 돈을 만지고 부모님 집도 사드리고 나서야 인정하셨지만...

그떄까지는 여전히 그 긴장감이 존재했었다.

유학가라, 차라리 의대나 법대로 다시 들어가라.

나는 혼자서 속으로 외쳤다.

'우리 집 형편에 공부만 하고 있을 수 없다고요'

'그런 쪽은 나 아니더라도 더 잘 할 사람들이 많다고요'

나는 대학 때 아버지 뜻대로 성장하지 않았다.

게임에 빠졌다.

공부를 뒷전으로 하고, 게임 플레이에 게임 동아리, 게임 개발에 몰두했다.

학점은 당연히 안 좋았고, 학사 경고를 받았다.

평생 그런 점수를 받았던 적이 없었는데,

그걸 보시고 아버지께서 희미하게 탄식하시던 한숨이 생각난다.

안타깝지만, 나도 그 탄식을 들었다.

오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 드디어 아버지께서 포기하신거야.

내 인생이잖아. 내 인생인데, 참견따윈 필요 없다고.

...

아버지가 당시 내 이름을 딴 공장을 만들고 운영하셨는데,

무척 고생이셨다.

그 후 이십년이상을 고생하신 것 같다.

덕분에 어린 동생은 내가 살던 시기보다 더 고생했다.

물론 그 본질적인 이유는 아니겠지만 아마도 아버지도 일할 맛이 안 났던 것 아닐까

지금 추측해 본다.

...

내가 더 설득했어야 했다.

내가 좀 더 내 비젼에 대해서 설명드렸어야 했다.


나는 아버지를 설득하기보다는

이 분야를 이해 못하는 아버지를 외면하였다.

하기사 오락실 게임 만드는 아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세대이잖는가?

내가 좀 더 아버지를 진심으로 대했다면 

아버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설득력을 키웠더라면

나에게도 그 키워진 설득력으로 사회생활이나 사업 피칭에 도움이 되었을수도 있었텐데 라는 생각이 지금은 든다.


게다가 결혼 상대자에 대한 마뜩찮은 시선도 분명 존재했었다.

내가 사랑했던 상대는 그 점을 눈치채고 분통 터뜨려하곤 했었다.

아버지가 나의 성장 가능성을 더 높게 평가하고 계셨을거다.

더 행복하길 바라셨을거다.


고등학교 입학 시험장에도 따라오셨던 기억이 난다.

수험번호가 '135'번 이었던 기억이 뚜렷이 난다.

아버지께서는 더하면 '9'라면서 완벽한 숫자라고 하시면서, 긴장한 나를 다독이셨다.

졸업식 날에도 멋진 정장을 입고 오셔서

함께 기뻐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송구스럽다.


대학에 가고 사회에 가면서 나는 점점 그런 아버지와 멀어져갔다.

10년이 지나 2002 월드컵 때 , 표를 구해, 부모님과 함께 대구에서 우리나라 경기를 보고 짜장면을 대접해드린 기억이 난다.

어떤 마음이셨을까?

그 당시 나는 선배와 게임 회사를 차려 엄청나게 고생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의 멘트나 행동에서 긍정적으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서먹해진 사이.

아버지도 나를 어쩔 수 없게만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한켠에는 아직도 기대감으로 아쉬워하셨던 었다.

술드신 날에 간혹 미국에 5촌 당숙님 계시니까 지금이라도 유학가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아버지도 나를 설득하시진 못하셨으니까...


이제 보면, 가족간의 설득, 받아들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다.

설득하거나, 받아들여야 한다.

외면하고, 지켜보고, 냉랭하게 기다려주는 것보다는

그런 지혜로움이 필요했었다.

아버지에게도 나같은 아들은 처음이었을거니까, 미숙했던 거고, 

나 또한 내 인생이라면서 너무 주장했던 것 같다.


다시 돌아간다면, 더 노력하긴 했을 것 같다.

그래도 자신없긴 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감에 너무 무책임했다.



2023년 11월 15일 수요일

아버지에 대한 기억 - 3

 

결혼 후에 종교 문제로 부모님과 서먹해졌다.

속으로는 매우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일이고, 그러다가 내 작은 가족도 흔들리게 될 수 있었다.

내 가족을 지켜야했으니까.

몇년을 부모님을 보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결심하셨는지 내가 다니는 교회에 함께 다니시기로 하셨다.

당시 경기도 여주에 사셨는데, 전철이 뚫렸다면서, 전철 타고 오면 편하게 올 수 있으니, 오신다고 하셨다.

아마 마음 한 켠에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그리도 사무쳤기 때문에, 또한 이러다가 아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리 하셨을 것이다.

여주에서 강동구 상일동까지 오는 길은 2시간 정도 걸릴 정도였다.

일요일 아침 11시까지 오셔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이른 아침에 출발하셨어야 했고, 그렇게 1년 정도를 함께 했다.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 중에 제일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뇌출혈로 1차로 쓰러지시면서, 재활을 했지만, 외출을 삼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와이프 추천으로 아버지는 집에서 성경 필사 작업을 하시기 시작했다.

그 넓은 방에 평상을 놓고 필사하시던 그 모습이 뚜렷하게 기억난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셨다. 은혜로운 하나님은 만나주셨을거다.

더 건강해지시고 서울에 있는 교회로 한번 방문하셨는데, 담임 목사님을 다시 만나면서 울먹이셨다. 

왜 우셨을까? 

아버지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으셨던 것일 것이다.

살고 보니 대한민국에서의 아버지는 좀 외로운 편이다.

아버지의 삶도 그러셨을 것이다.

한국 전쟁을 어릴 때 겪으셨고, 지독한 가난을 겪으셨고, 독재 시절을 겪으셨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이른 아침에 출근하고 밤늦게 돌아오셨었다. 

유교사상이 지배적이었는데, 뜬금없이 아들이 하나님 믿겠다며 제사도 거부하면서 멀어지니 많이 속상하셨을거다.

외로우셨을거다.

다행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만나셨으니까...

뇌출혈 1차이후 재활하고 아버지와 그간 못했던 인생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언제 가장 행복했냐는 나의 질문에

여주에서 서울까지 오셔서 내가 다니던 교회에 함께 다녔던 시간이 가장 행복하셨다고 답해주셨었다.

당신에겐 바삐 살던 인생에서 그제서야 안식하며 그 시간을 즐기셨던 것으로 생각해야 할까?

너무 송구스럽다.

잘 해드린 것도 별로 없는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 - 2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이었다.

수학 경시대회에서 동상을 받아, KAIST 에서 국제 대회 선수 선발을 위한 수학 겨울 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달여 동안을 지내게 되었다.

나는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었다. 

1학년때는 수학 올림피아드를 참가하지도 않았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2학년때 본 것이라서 그리 자랑스럽지도 않았고, 동기들은 2학년때 KAIST 에 합격해서 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고등학생이었으니 말이다. 

평소 성적도 나쁘지 않았는데, 떨어진 것이 너무 억울했다.

답안지에 실수했을거라 생각했다.

기죽어 있던 나를 격려해 주신 건 아버지였다.

여전히 아버지에게는 내가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던 것 같다.

2학년때 입시에 떨어진 후에 아버지는 학교에 찾아오셨었다.

팔목 시계를 하나 사 오셨다.

담임 선생님을 먼저 만나시고, 상담을 하셨던 것 같다.

담임 선생님 앞에서 그 시계를 선물 하시면서, 앞으로 1년 다시 잘 하면 된다고 격려해주셨던 장면이 떠오른다.

동시에 그 해 겨울에 대전에 있는 수학 올림피아드 겨울 학교로 큰 이불짐을 아빠와 함께 이고 하얀 눈밭을 걸으면서 대화하던 모습이 교차되어 떠오른다.

당시 차도 없어서 고속버스 타고 일반 버스 타고 갔었더랬다.

2년후 쯤에 아버지는 승용차를 할부로 사셨다. 쥐색 엑셀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는데, 자식한테 부끄럽지 않으시려고 무리하셨던 것 같다.

그 새하얀 눈밭에 빛나던 햇살이 아직도 따스하게 기억난다.

아버지와 나, 둘이서 뽀드득 뽀드득 걷던 아침의 햇살.

그 겨울 학교의 풍경은 참 신기했었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영재라면서 우리랑 같이 공부했다. 

대학교 교수님들한테 수학을 배우는 느낌도 달랐다.

집중력 강화라며 심호흡을 하면서 자기 최면술 같은 것도 배웠다.

그런 소중한 시간이 아버지가 데려다 준 여행과 같았다.

몇달 후에 선수 선발전 시험이 있었는데 아쉽게 선발되지 못했다. 

수학 문제 6개를 4시간 동안 풀었던 것 같다.

아쉬운 점수차로 떨어졌다고 들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될 뻔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자부심을 간직하고 이후 인생을 살았던 것 아닌가 싶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 1

 

아버지를 마음으로 아직 못 보내드린 것 같다.


아버지의 마지막 얼굴이 아직도 기억이 나고, 나에게 애썼던 마음이 문득 문득 떠오른다.

특히, 아무도 나를 챙겨주는 것 같지 않는 순간에 그렇다.

북받쳐 오르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따스한 느낌이 심장을 치고 지나간다.

그 따스한 느낌을 붙잡으려 지나간 추억들을 더듬는다.


나를 격려해주었던 모습이 생각난다.

중학교 1학년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싸우셨다.

어린 나에게는 정말 지옥과 같은 날들이었다.

무엇때문에 싸우셨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묻지도 않았다.

전주의 20평짜리 임대 주택에 방이 3개 있었는데, 부모님과 어린 동생이 자던 안방, 내 방, 그리고 창고나 게스트 룸으로 쓰던 방이 있었다.

부모님이 싸우던 날 다음 날은 엄마가 도시락을 싸주시지 않고, 빵 사먹으라며 1천원인가 2천원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한번은 크게 싸우셨는지 아버지는 창고같은 방에서 한달을 주무셨다.

그러다가 나를 부르셨다.

앞으로 학창 시절에 영어가 중요하니, 영어를 나에게 가르치겠다고 하셨다.

기초 영문법책을 하나 사오라며 5천원인가 1만원인가를 주셨던 것 같다.

다음 날 서점에서 책 한권을 골라서 창고에 있는 아버지를 찾았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대학교 시절에 과외 했던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많이 가르쳐봤다고 하셨다.

뭘 배웠는지는 기억도 안 나는데, 꼬박 몇달을 가르쳐주셨던 것 같다.

그때 아버지 나이는 40대 초중반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들 교육에 대해 엄청 열정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나는 하나 뿐인 딸에게 그러질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정작 딸은 내가 가르치려고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서운함도 있는 것을 생각하면,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그 분의 스킬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대학때 보시던 민중서림의 영한사전을 보여주셨다.

닳고 닳아서 책이 반듯하지 않았고 책 안의 내용은 빨간 볼펜으로 공부하던 흔적이 많았다.

과외 할 때 부잣집 딸을 가르친 적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ㅋ 

지금와서 추측컨데 썸타는 정도였던 것 같기도 하고 ㅎㅎ , 아쉬움이 묻어나오는 탄식도 들었던 것 같다. ㅋ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입학하면서 작은 아버지도 서울로 오셔서 공부했던 이야기도 하셨던 것 같고, 작은 아버지도 공부 잘 하셨다면서 자랑스러워하시곤 하셨다.

아뭏든 그렇게 열심히 하셨었구나라고 느끼며 나도 영어 공부에 관심을 느끼며 공부했었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중학교 내내 영어는 1등을 놓치지 않고 후에도 영어는 즐기면서 공부했었다.

감사함을 아직도 느낀다.

여운이 아직도 흐른다.



2023년 11월 8일 수요일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못 해 드린 것

 


아버지와 친척들과의 마지막 모임을 못 가졌던 아쉬움


아버지가 몇달 전 돌아가셨다.

난 그리움과 후유증이 없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상당히 있다.

실제로 보내드리고 한두달은 공황증세로 아무것도 못했다. 덕분에 하던 일들이 많이 틀어졌다.

그런 나를 보며 놀란다. 아버지께는 마음 다 드리고, 아쉬움 없이 보내드렸다고 생각했었는데, 문득 문득 아버지에게 못해드린 아쉬움이 진하게 여운으로 남는다.

그래도 아들로서 가장 기쁜 것은 아버지가 생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가신 것.

아쉬운 것은 아버지가 괜찮은 상태일 때, 친척들과의 화목한 모임을 갖지 못한 것이다.

뇌출혈로 1차 쓰러지시고, 다행히 다시 재활 하셨을 때, 그 모임을 했었어야 했다.

어려운 재활을 거쳤지만, 다시 허무하게 2차 뇌출혈 재발하고, 4년여를 고생스럽게 누워계시다가 얼마 전에 가신 것이다. 


전형적인 유교 집안 


우리 집안은 전형적인 한국식 유교집안이었다.

명절에는 아주 먼 땅끝에 가까운 곳까지 가서,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하고, 5촌 친척 집에 가서 아버지의 4촌 친척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었다.

어린 눈에는 아버지의 형제들이 가깝고 우애 좋아보였다.

아버지 세대는 전쟁도 겪고, 매우 가난한 시기였으니, 다들 돕고 살았어야 했던 시기였을 것이다. 

친척들간에 서로 도왔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흐믓하였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당신의 형제들에게 베푼 은혜로운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흐믓하였다.

할머니 생전에 할머니 댁에 모여 3촌 친척 어른들, 4촌 형제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았었다.

아버지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으며, 당신 아들을 자랑스러워하시면서 집안에서 역할을 하길 기대하셨었다.

개인적으로는 내 인생에 도움도 되지 않는 이들한테 과도한 친목 도모를 싫어했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상당했었는데, 아버지의 마음 속에는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우리 세대의 그것보다 훨씬 폭 넓었던 것 같다.

아마도 아버지가 친척들에게 받은 사랑을 아들인 나를 통해 베풀었으면 하는 마음이셨을 것이다.

그러한 부채감이 아직도 있다.


지역적으로 멀어지며 멀어지고, 제사를 안 지내며 끊어짐


친척들과 사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교류를 안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더라.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멀어졌다.

그리고, 내가 결혼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고, 친척들과 더 멀어지기 시작했다.

은혜롭게도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지침에 따라서, 지내던 제사 행사를 거부하게 되었고, 친척들과 만날 시간이 없어지면서 멀어졌다.

4촌 형제들도 다 성장하고 다 바쁜데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명절 때 뿐인데 , 그 때 못 만나니 멀어질 수 밖에.

어릴 때는 사이좋게 놀던 친척 형제들이고 가끔 그립긴 하지만,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보다 가까울수 없고, 다들 각자 살기 바쁜데 교류 할 일도 없더라.

친척이라고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이 부담감이 없는 것도 아닌 관계인데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에는 더 큰 가족이었기에,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못한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하기 어렵다.

차라리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에게 더 잘 해주고 싶지, 친척이라고 더 잘 할 이유는 없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가진 부채감을 갚아야 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만나시고 제사에 대해서는 포기하시면서 마음은 편해졌었지만, 친척들과의 친밀감을 더 느끼고 싶으셨을 것이다.

대가족의 모임에서 마지막 환담을 나눌 기회를 못 해드린 것에 대해 송구함을 느낀다.


이 시대에서의 대가족은?


4촌들이 그립다.

가끔은 많이 보고 싶다.

가끔은 힘든 인생 이야기를 터 놓고 다 이야기 나누고 싶다.

21세기에서의 대가족은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일까?

더 잘 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마음의 풍요로움은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만큼 사는 것일까?

더 사랑하며 살자. 더 베풀고 살자.


아버지, 천국에서 부디 편하게 지내고 계시길 빌게요.